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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http://march.kwedu.net/gangi2.htm

제 2 강의.

원시사회 및 고대사회의 교육


<목 차>

1. 원시사회는 어떤 교육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2. 서양 고대사회는 어떤 교육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3. 한국 고대사회는 어떤 교육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원시 및 고대사회의 교육'이라는 주제로 교육사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1. 원시사회는 어떤 교육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먼저 '원시'라는 말부터 잠깐 살펴봅시다. 우리가 '원시적'이라고 하면 흔히 '야만', '미개' 등의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것은 곧 '현대'보다 덜 발달된 사회, 덜 인간적인 사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죠. 그러나 사실 어떤 기준에서 보느냐에 따라 원시사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많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대의 과학문명은 원시시대의 그것에 비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학문명 덕분에 온갖 생활의 편리를 향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과연 우리 현대인이 원시시대의 인간들보다 더 진실한가? 더 행복한가? 더 정의로운가? 더 평등한가? 그리고 더 인간적인가?" 제가 어찌 보면 얼토당토 않은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우리가 너무 당연히 여기고 있는 생각도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매우 위험스러울 수도 있고 전혀 진실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때때로 TV를 통해서 아프리카나 아마존 밀림 속에서 외부 세계와 완전히 고립된 채 문명 이전의 생활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원시부족들의 이야기를 접하곤 합니다. 과학문명이라는 가치 판단 기준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 그들의 생활은 미개함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생활 자체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을 갖고 보면 우리보다 훨씬 더 평등하고 평화로우며 풍요롭고 선하며 진실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혹시 그 '평등하고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선하고 진실한' 삶은 사실 우리 현대인들 모두가 꿈꾸는 이상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원시부족들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고 인간적인 존재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우리는 원시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단순히 미개한 것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속에서 우리보다 나은 측면들을 발견하고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에서 벗어나 각 시대, 각 사회의 삶의 방식이 가진 가치와 의미를 인정할 때 그 만큼 우리의 삶이 풍부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시사회의 교육적 특징을 살펴보기에 앞서 원시 인류의 발달과정을 잠깐 생각해 볼까요? 인류는 오랫동안 생존을 위해 여기 저기를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흔히 말하는 수렵생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다가 인류는 언제부터인가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음식을 저장하고 씨앗을 뿌려 곡식을 거두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가 대략 신석기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입니다. 미래학자들은 정착의 가장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던 씨앗의 발견을 인류 제1의 혁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말은 씨앗의 발견을 통해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정착생활을 계기로 인류는 실로 어마어마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변화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앗의 발견을 통해 잉여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 잉여생산물 덕분에 인류가 생존 그 자체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는 점입니다. 생존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과거에 비해 훨씬 수준 높은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인간의 사회적 관계 역시 과거보다 복잡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착생활은 씨족이나 동일한 종족과 같은 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결국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과 대립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갈등과 대립은 비단 한 집단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이웃한 집단간에도 발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그만큼 넓은 영토가 요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웃한 마을간에 빈번한 전쟁이 발생하였고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은 더 큰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서 소규모의 여러 씨족집단이 하나의 부족을 형성하게 되고, 다시 여러 부족이 모여 하나의 부족국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부족국가가 그 규모가 커지고 조직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지면서 바야흐로 고대국가가 형성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원시사회란 부족국가 이전의 사회에 해당됩니다. 이제 앞에서 설명한 내용들을 염두에 두고 원시사회의 교육적 삶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합시다. 유병려라고 하는 중국의 교육사학자는 원시사회의 교육을 다음 3단계로 설명했습니다.

1단계 : 모방과 참여(자연학습, 유희 모방, 자연지식의 획득)

2단계 : 훈련(생산훈련, 신체 및 군사훈련, 도덕 훈련)

3단계: 성년식(입사식, 관례, 할례)

서양의 교육사학자인 몬로(P. Monroe)는 원시교육의 특징은 비진보성과 모방성에 있다고 보고, 원시인들은 있는 그대로의 환경에 순응하며 실질적인 생활의 필요에 따라 무의식적인 모방에 의존하다가 점차 의식적 모방의 단계를 거쳐 종교적 의식과 주문, 수렵, 전쟁, 부족의 신화와 전설 등에 관한 이론적 교육으로 이행해 갔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이 강의에서는 원시교육의 특징을 '모방교육', '신앙교육', '질서교육'으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하에서는 이 세 가지 교육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모방교육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 즉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던 시대에는 아직 의도적, 계획적 교육이 없었습니다. 생존과 생활을 위해 부모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했던 것이죠. 따라서 최초의 교육은 '가르침'이라는 의미의 교육이라기보다는 '배움'이라는 의미의 학습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인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들의 말과 행동을 우연히 따라하게 되면서 고정된 언어 및 행동양식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밝은 표정의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의 표정 역시 밝고, 부부싸움이 잦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목소리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모두 무의식적인 모방의 결과입니다. 인류 최초의 교육도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 대한 무의식적인 모방 그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의식적ㆍ계획적인 차원의 교육이었다기보다는 생존 또는 생활상의 필요에 의한 무의식적 학습이었다고 볼 수 있죠.

둘째로, 신앙교육입니다. 원시인들은 생존과 안전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절대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징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의존하였습니다. 이러한 신앙생활 형태를 원시종교라 하는데, 원시종교는 흔히 애니미즘(Animism), 샤머니즘(Shamanism), 토테미즘(Totemism) 등이 있습니다.

애니미즘은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자연종교인데, 원시인들이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자연사물을 영혼을 가진 존재, 살아있는 신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종교입니다. 그러나 자연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지 않고 인간 집단이 보다 복잡해짐에 따라 애니미즘보다 한 차원 발전한 원시종교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입니다. 즉, 사회조직이 복잡해지고 사회집단이 보다 분화되면서 자연신에 대한 제례의식의 사회적 중요성이 증가하고, 그에 따라 제례를 전담하는 사람들(마법사, 주술사, 무당, 예언자 등)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들을 일컬어 샤먼(Shaman, 또는 샤만)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인간을 대신하여 자연신과 접촉하여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직은 인간의 생사가 자연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집단 내에서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다시 자연신에 대한 집단적인 제례의식이 더욱 정교하게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샤먼의 사회적 지위가 지배자의 위치까지 격상한 경우 때때로 샤머니즘은 한 국가의 건국신화로까지 발전하기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 나라의 단군신화입니다. 지금도 우리 나라 일부 지방에서는 무당을 일컬어 '당굴' 또는 '단골'이라고도 합니다. 당굴이나 단골은 단군과 어원이 같은 말들인데, 이러한 사실은 단군이 무당과 같은 샤먼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입니다. 참고로 이 단군이라는 말은 '천제' 또는 '하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당시 샤먼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절대적인 것이었는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대표적인 원시신앙으로 토테미즘을 들 수 있습니다. 원시인들이라고 해서 모든 지역이 동일한 생활환경을 갖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 지역, 종족, 또는 부족에 따라 그 나름의 독특한 숭배대상이 생기에 되었습니다. 즉, 특정한 씨족 또는 인간집단과 특정한 동식물과의 주술적 또는 원시 종교적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한 관계에서 지역과 부족에 따라 특정한 금기사항이 생기게 되고, 집단의 안정을 위해 집단 구성원 모두에게 그 금기사항에의 준수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리고 금기사항을 준수함으로써 집단의 단결을 도모하고 나아가 더욱 공고한 단결을 위해 더 정교하고 발달된 형태의 의식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우리가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배운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과 같은 종교행사들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제천행사는 집단의 동질성, 협동성, 윤리성 등을 교화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상의 설명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종교행사를 통하여 일반인들을 교화하고 집단의 단결을 도모함으로써 집단의 안녕을 꾀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이는 교육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화와 집단의 단결을 통한 사회유지는 전문적인 용어로 '사회화'에 해당하는 것이며, 사회화는 교육의 중요한 사회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또 원시신앙을 교육과 관련시켜 음미해 보면, 사회의 유지를 위해 그 복잡한 제례의식들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 했을 것이며, 따라서 그 제례의식을 전수하고 전수받는 교육적 활동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굳이 현대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는 일종의 직업교육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원시사회에서도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대사회와 유사한 교육들이 존재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원시사회의 교육적 특징으로 질서교육을 들 수 있습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음식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인가 씨앗을 저장했다가 파종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면서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착생활로 인해서 집단적, 계획적 행동의 필요성이 더욱 증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간의 긴장과 갈등이 잦아지고, 이해관계가 더욱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집단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 각 집단 내에서 질서, 윤리, 규칙 등이 생겨나게 되고, 나아가 이러한 질서, 윤리, 규칙 등을 다음 세대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필요성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을 반영하여 발생한 풍습이 바로 성년식 또는 입사식이라고 하는 사회의식입니다.

여기에서 성년식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합니다. 먼저 우리 나라의 예를 들면, 상고시대 삼한(변한, 마한, 진한)지역에 있었다는 성년식입니다. 중국의 역사책인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은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나라에서 성곽을 쌓을 때 장정들이 필요하여 젊고 용감한 청년들을 모아, 등가죽에 구멍을 내어 새끼줄을 관통하여 묶었다. 또한 그 줄에 큰 나무를 매달아서 하루종일 환호하며 힘을 써도 아프다고 하지 않으면 건장하다고 하였다." 즉, 소년들의 등에 커다란 새끼줄을 관통시키고 거기에 큰 나무를 매달아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니게 하고, 그 고통을 거뜬히 이겨내는 소년들을 장정(어른)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일부 학자들은 그러한 광경은 성년식이 아니라 집단노동을 묘사한 것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즉, 청년들이 지게를 지고 노동요를 흥겹게 부르면서 노동을 하는 모습이 지게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중국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성년식인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해석이 옳은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성년식을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할례의식(일종의 포경수술)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이는 원시 헤브라이족의 성년식입니다. 터키에서는 지금도 이 할례의식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실시되고 있다고 합니다. 할례에 따르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비로소 성인사회에 편입될 수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 할례의식을 세례의식 못지 않게 중요시합니다. 터키에서도 이 할례의식을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할례를 마친 아이를 축하해 주기 위해 온 가족,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또 아메리카 인디언의 어느 부족의 성년식을 보면, 일정한 나이에 이른 청소년들을 모아 그들의 등가죽에 새끼줄을 꿴 다음, 마을 중앙의 광장에 박혀있는 큰 나무 기둥에 그 새끼줄을 묶어 놓고 나무 기둥이 뽑힐 때까지 서로 당기게 하는 의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태평양의 어느 조그마한 섬에서는 성년에 이른 청년들을 모아 동네 어귀에 있는 큰 벌집을 일부로 건드려 벌들을 화나게 합니다. 당연히 청년들은 화가 난 수십 또는 수백 마리의 벌들에게 쏘이게 됩니다. 청년들은 벌에 쏘인 고통을 이겨내고서야 비로소 그 집단의 경제생활을 의미하는 카누를 가질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하나의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지요.

또 여러분들이 몇 년 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에어」에도 성년식을 묘사한 장면이 나옵니다. 제 기억엔 미국인 농구코치가 아프리카 부족끼리의 중요한 농구경기에 참가하기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험준한 산정에 어떤 징표를 갖다 놓고 오고, 배를 칼로 난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그 부족의 일원이 되기 위한 일종의 성년식입니다.

이 외에도 아프리카나 인디언들에 관련된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죽음을 무릅쓰고 맹수를 사냥하여 그 가죽을 벗겨 온다거나 험악한 산봉우리에 올라가 자기가 아끼는 중요한 물건을 놓고 온다거나 하는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는데, 그런 장면들은 모두 성년식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상에서 몇 가지 성년식의 예를 소개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종류의 성년식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년식은 교육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요?

교육사적으로 보면, 성년식은 "최초의 형식교육"이라는 의의를 갖습니다. 성인사회로의 진입에 필요한 능력(생산능력, 전투능력, 질서유지능력 등)에 대한 시험임과 동시에 그 자체가 그러한 능력과 용기 그리고 태도를 길러주기 위한 교육의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무사히 마치게 되면 그 사회의 진정한 한 일원으로 인정받고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원시사회의 성년식은 그 형식은 달라졌다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받고 있는 초ㆍ중등교육도 그 본질적인 성격에서 보면 원시사회의 성년식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원시사회의 교육적 특징으로 모방교육, 신앙교육, 질서교육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원시사회의 교육은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교육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교육이 인간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활동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비록 그 형식과 방법과 내용 등은 다르더라도 인간의 삶에 있어 교육이 근본적인 요소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점은 한 시대 또는 사회의 교육은 그 시대와 사회가 어떤 사회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경제적 구조란 쉽게 말해서 먹고 사는 방식과 그 먹고 사는 방식을 근간으로 형성된 사회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교육사를 공부하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입니다. 어떤 사회가 어떤 교육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할 때, 왜 그러한 교육적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추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으로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특징으로부터 교육적 특징을 유추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교육 필연적 존재'임과 동시에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 교육도 사회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존재하고, 그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여러 조건에 부합하는 교육 또한 존재합니다. 원시사회도 이러한 이치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2. 서양 고대사회는 어떤 교육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서양 고대사회의 교육에 대해서는 그리스와 로마를 중심으로 살펴봅시다.

1) 그리스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교육

그리스는 앞에서 설명했던 국가의 형식을 완전히 갖춘 사회로서 성격이 서로 다른 스파르타와 아테네로 대표됩니다. 그리스 반도에는 그리스 민족이 침입하여 살기 전에 에게문명을 만들어 낸 선주민족이 있었습니다. 찬란한 청동기문명을 지닌 에게인들은 왕을 받들어 모시며 교육을 하여 번영하였으며 견고한 성벽을 쌓아 시민과 시의 재산을 보호하였습니다. 그리스 민족은 이미 고도의 문화를 가지고 있던 선주민족의 거주지에 북쪽으로부터 침입해서 그들을 추방하고 때로는 노예화하여 그 땅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그리스 사회가 노예제 사회였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를 공부할 때 단순히 그들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만을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찬란한 문화와 문명 이면에는 수많은 노예들의 고통스럽고 비참한 희생이 존재했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교육적으로 어떤 특징을 갖고 있었을까요?

먼저, 스파르타의 교육부터 살펴봅시다.

스파르타는 사회는 극소수의 귀족과 그에 30배에 달하는 평민과 노예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노예들의 잦은 반란이 있었겠죠. 더욱이 험준한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농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른 국가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즉, 스파르타는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수십 배에 달하는 피지배자들을 억누르고, 외적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농토 확보를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국가체제는 어떤 형태였을까요? 그것은 바로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체제로서 일종의 군대국가였을 것입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현실 사회와 동떨어진 저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육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 사회 속에서, 그리고 그 사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존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의 교육은 그 사회의 구조적인 특징으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의 교육은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애국시민,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전사를 양성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그만큼 강력하고도 혹독한 훈련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부족의 장로들이 갓 태어난 아이를 면밀히 검사하여 건강하면 키우게 하고, 연약하면 깊은 산골짜기에 버리도록 명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부모가 자기 마음대로 자식을 기르거나 교육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7세부터 거의 30세에 이르기까지 엄격한 조직생활을 하도록 요구되었습니다. 문자교육은 실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것에만 한하였고, 훈련의 대부분은 명령에의 복종, 고통에 대한 인내, 죽음을 불사할 정도의 용맹성, 한겨울에도 가벼운 옷 한 벌로 견딜 만큼 건강한 신체 등을 목표로 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스파르타에서는 시민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일로 여기도록 교육했으며, 마치 꿀벌이 언제나 공동생활을 하도록 운명지어져 여왕의 주위에 둥글게 모이는 것처럼, 주체적인 자아를 잊고 오직 국가를 위한 삶으로 일관되도록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완성을 위한 교양교육이나 정서교육은 계획적으로 무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평민들이나 노예들은 그러한 교육마저도 전혀 받지 못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스파르타의 교육은 실전적인 전투 능력을 지닌 군인이나 건강한 신체와 강한 애국심으로 단련된 시민의 육성을 그 유일한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교육의 내용도 승마, 활쏘기, 달리기, 수영, 야영 등 전사를 기르기에 적합한 호전적인 내용으로 채워졌으며, 교육 방법 역시 철저한 복종심과 인내심을 기르기에 적합한 혹독한 체벌이나 단식 등과 같은 호전적인 방법으로 일관되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이라는 말도 이러한 가혹한 훈련으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테네의 교육을 살펴봅시다.

스파르타와 더불어 그리스의 도시국가를 대표하는 아테네 시대의 교육은 스파르타와 같은 철저한 국가주의 교육이 아니라 훨씬 가족주의적이며, 자유롭고 문화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스파르타 아이들이 그 출생과 동시에 국가의 관리하에 놓인 것과 달리 아테네에서는 얼마간 가정에서 키워졌습니다. 아테네에서도 연약하거나 불구인 아이들을 죽였는데, 이는 스파르타가 국가 입장에서의 처벌이었다면 아테네에서는 가정 입장에서의 처벌이었습니다.

아테네의 교육제도는 스파르타에 비해 국가의 통제력이 꽤 제한되어 있었으며, 가정의 책임에 좌우되는 측면이 많았으며, 군무기간도 훨씬 짧았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대내외적인 위협에 대해 지배집단으로서 집단원 모두가 결속하여 동일한 신을 모시고 자기 집단의 존속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군국주의적 체제였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합니다. 단지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비해 비교적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이고 문화적이었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아마 이러한 차이는 아테네인들의 민족적인 기질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조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스파르타가 험악한 산악지대에서 그만큼 치열하고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다면, 아테네는 비옥한 평야지대와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농업과 상업을 겸할 수 있었고 그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파르타에 비해 아테네는 민주적인 정치체제가 발달했습니다. 그리하여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비해 상당히 자유롭고 인간적인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가 결국 교육적 특징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을텐데, 그렇다면 아테네의 교육 목적, 교육 내용, 교육 방법 등을 어떠했을까요? 교육의 목적은 심신의 균형, 도덕적 교양, 사회적 책임, 자유로운 시민의 양성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목적에 따라 교육 내용 역시 체육, 음악, 독서 등을 폭넓게 포괄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단계를 보면, 출생 직후에는 부모의 손에서 양육되다가 7세가 되면 가정에서 '파이다고고스'(Paidagogos; 교복)라는 노예에게 맡겨져 교육을 받았고, 체조학교(palaestra)와 음악학교(daiaskaleion)에서 체육과 음악을 배웠습니다. 15세에 이르면, 김나지움이라고 하는 국영훈련소에 들어가 경주, 복싱, 수렵, 수영 등을 배우고, 18세에 이르러 에페베(ephebe)라고 하는 청년단에 들어가 아테네의 신과 국가에 맹세하고, 2년간의 실제적인 전투훈련과 군복무를 마친 후 일정한 시험을 거쳐 완전한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는 후기에 이르러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하고, 그와 함께 개인주의적 인문주의 교육의 성격이 강화(3학 4과가 주된 교육내용;문법,수사학,변증법:산수,기하,음악,천문학)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퇴폐적인 향락문화가 범람하게 되고, 국력의 쇠퇴로 인하여 결국 패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상에서 그리스를 대표하는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교육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 갑시다. 우리는 흔히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사회상으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를 들곤 합니다. 특히 교육적으로 아테네는 가장 이상적인 교육국가, 즉 파이테이아(Paideia)로 그려지곤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노예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던 귀족 계급에게는 가장 이상적일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철저하게 착취당하고 억압당했던 노예들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이상적일 수 없는 사회였을 것입니다. 극히 일부에게만 완벽한(?) 교육을 제공해 주는 사회가 이상적인지, 아니면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교육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제공해 주는 사회가 더 나은 것인지, 가장 기초적인 교육 공간인 유치원과 초등학교 교사가 될 여러분 스스로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권력이든, 자본이든, 교육이든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을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반대로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로마의 교육

로마는 초기에 왕정과 공화정을 거쳐 포에니 전쟁 후에는 강력한 제정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대 국가로 확립되었습니다. 강력한 노예제 사회였다는 점에서는 그리스와 다를 바가 없었으나, 그리스에 비해 가족 중심적인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시대에는 남편 또는 아버지의 권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리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가 매우 발달하였으나,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리스의 기생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교육 역시 그리스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인들의 성격상의 기질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모방성이 매우 강했다고 합니다. 또한 도덕심과 준법 정신 그리고 공동체적 단결의식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또한 정치의 발달로 인해 높은 수준의 변론술을 지니고 있었으며, 드넓은 영토를 가진 만큼 대담하고 진취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이 세계정복 기간에는 잘 유지되었으나, 정복이 완료된 후에는 후기 그리스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퇴폐문화의 유입과 함께 급속도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시대를 다룬 여러 영화들을 통해서, 대리석으로 사치스럽게 치장한 대저택에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아름다운 무희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는 장면들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극에 달한 사치와 향락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들을 염두에 두면서 로마시대의 교육적 특징들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로마 초기와 후기의 교육적 특징이 매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므로, 여기에서도 초기의 왕정 및 공화정시대와 후기의 제정시대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초기 왕정 및 공화정시대의 교육적 특징입니다. 이 당시 로마는 정복전쟁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로마에는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된 강력한 군대와 질서 있는 시민이 요구되었습니다.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도 국가를 위해 개인적인 희생을 얼마든지 감수할 애국적인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교육 내용 역시 전쟁수행과 공적 생활에 필요한 도덕심, 준법정신, 기초적인 3R's 및 강한 신체적 훈련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교육은 지식 그 자체보다는 실천을 우선으로 하는 실제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또 다른 교육적 특징은 이 시대의 교육이 공립학교를 통해서 수행된 것이 아니라, 강력한 부권을 기초로 하는 가정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제정시대의 교육을 살펴봅시다. 로마는 기원전 2세기경에 유럽 일대를 모두 자신의 영토로 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대제국을 건설하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전쟁의 필요도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양한 방면에서 생활과 가치관이 초기의 왕정이나 공화정시대와는 많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검소하고 실질적이며 생산적이고 애국적이던 국민성이 그리스의 유산인 진ㆍ선ㆍ미 등과 같은 심미적 가치를 추구하거나, 사치와 방종, 향락 등과 같은 퇴폐적인 문화를 탐닉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정복전쟁을 통해 얻은 수많은 노예들의 노동에서 나오는 부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로마의 지배계급은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생활을 즐기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사랑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 또한 초기의 성격이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즉, 후기 로마의 교육적 이상과 목표는 그리스 말기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초등교육에서는 독ㆍ서ㆍ산, 시와 동화 등을, 중등교육에서는 그리스문법, 라틴어문법, 7자유과 등을, 고등교육에서는 수사학, 철학, 법률, 웅변, 역사 등을 가르치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특징은 그리스 말기에 나타나는 특징과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상에서, 서양 고대사회의 교육적 특징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서양 고대 사회는 기본적으로 노예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육은 오직 지배계급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은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한 이념적, 기술적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일본의 교육사가인 우메네 사토루는 지배계급의 직분을 크게 '군사, 제사, 정치'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이는 매우 통찰력있는 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ㆍ제ㆍ정 세 가지는 결국 노예제사회에서 그들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기 위한 기초적인 임무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교육도 이 세 가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교양 있고, 자유로우며, 문화적이었던 아테네의 교육도 넓게 보면 이 세 가지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3. 한국 고대사회는 어떤 교육적 특징을 갖고 있는가?

이제 이번 강의의 마지막 주제인 한국 고대사회의 교육적 특징을 검토해 봅시다. 먼저 삼국시대의 정치ㆍ사회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서양 고대사회와 마찬가지로 전제주의 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군인의 양성이 교육의 주목적이었겠지요. 또한 강력한 중앙집권식 노예제 사회였기 때문에, 국가관리에 필요한 관리 양성도 교육의 주요한 목적이었습니다. 문화적인 특징으로는 불교가 서민 생활 전반에 확산되어 있었으며, 지배계층에는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유교가 확산되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문화적인 면에서 비형식적 교육에는 불교가, 형식적인 교육에는 유교가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기억하면서, 삼국의 교육적 특징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합시다. 고구려의 주요 교육기관으로는 태학과 경당이 있었습니다. 태학은 최초의 제도적 교육기관으로서, 국가의 관리양성을 주목적으로 소수림왕 2년(372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이 때가 고구려의 정치제도가 정립되던 시기였는데, 태학의 설립도 이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즉, 안정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유능한 관리가 요구되었고, 당연히 관리양성기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고등교육기관이 가장 먼저 생기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국가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당시의 정치이념이었던 유교적 교육이념에 기초했으며 지배계급인 귀족의 자제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되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경당은 중등교육을 담당하던 사학기관으로 지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귀족은 물론이고 서민의 미혼자제에게도 그 문호를 개방했는데, 주된 교육내용으로는 유교 경전을 읽고 무예도 읽히는 등 문무일치의 성격을 지녔습니다. 이는 국가의 성장단계에서 일반 백성을 군대에 동원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그러한 필요성에 의해 서민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미성년 집회인 경당은 국가의 군사적 요구에 부응하여 고대국가 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유교적 덕목을 가르치고 군사적 훈련을 실시했던 것입니다.

백제에 교육기관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불행하게도 문헌상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285년에 박사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사실과 백제의 행정제도상 교육을 담당하는 부서(사도부)가 있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높은 수준의 교육기관이 틀림없이 존재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신라는 국학으로 대표되는 학교와 함께 신라만이 갖고 있는 매우 독특한 교육제도였던 화랑도가 있습니다. 먼저 화랑도 교육을 살펴보면, 유교이념과 불교이념 그리고 민간신앙이 종합되어 형성된 교육체제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세속오계(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현명한 지도자와 선량한 백성의 양성, 용감한 군인정신과 강력한 애국심 고양, 자연과 국사에 대한 사랑과 애호 고취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주요 교육 내용으로는 유교경전, 활ㆍ창ㆍ검, 기마, 등산, 경주 등의 무술훈련 등을 들 수 있고, 교육 방법으로는 수양, 가무, 도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결국 화랑도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유능한 무사 및 지도자 양성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풍부한 교양을 지닌 실천인의 양성에 그 목적이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신라의 국학을 검토해 봅시다. 국학은 고구려의 태학과 동일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유교이념에 입각한 관리를 양성하는 것이 그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교육 내용은 논어, 효경, 예기, 춘추 등과 같은 유교경전을 주로 하면서, 기술교육과 일반적인 교양교육도 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통일 후에 독서삼품과라는 과거제도가 생기면서, 국학은 단순한 관리등용기관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즉, 통일 이전에는 화랑도에서의 천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고 통일 후에는 국학이 설립되어 여기에서 관리를 충당했으나, 나중에 고등교육을 받은 자들이 늘어나면서 적절한 선발제도가 요구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과거제도가 도입되는데, 이를 계기로, 마치 오늘날 고등학교가 대학입시 준비기관으로 전락한 것과 마찬가지로, 국학이 관리등용기관을 전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라의 국학은 그 성격이 학벌과 학력 위주의 등용제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폐해는 고려, 조선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번 강의를 정리해야 하겠군요. 서양 고대사회의 특징은 앞에서 이미 정리했으니까, 여기에서는 한국 고대사회의 교육적 특징만 간단히 요약합시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한국의 고대 사회 역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거의 지배계급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민을 위한 교육제도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고대사회의 학교는 공통적으로 고등교육기관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시대가 발전되면서 귀족의 자제들에게 집중되어 있는 교육기회가 점차 서민들에게도 개방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렇게 보면, 교육의 역사란 서민들의 그들의 교육받을 권리와 기회를 쟁취해 오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서민들에게 교육기회가 완전히 개방된 것이 최근 20세기라고 할 때, 서민들이 교육에 대한 그들의 당연한 인간적 권리를 찾는 데 결국 수 천년의 역사가 흐른 셈이죠.

이상으로 오늘 강의를 마칩니다. 다음 시간에는 서양 중세의 교육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다시 음미해 보기

1. 단군신화의 교육적 의의와 화랑도의 교육적 특징.

2.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교육적 특징을 비교해보고, 왜 각각 그러한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이해하기.

* 미리 생각해 보기

1. 중세는 어떤 배경에서 출현하게 되었나?

2. 중세의 사회ㆍ경제적 특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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