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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 http://march.kwedu.net/mm/mm04.html
중세사회의 교육2
- 고려와 조선
안녕하세요. 오늘은 중세사회의 교육 두 번째 시간으로, 우리 나라 고려와 조선사회(실학사상기까지)의 교육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나라의 고려와 조선을 중세사회에 포함시킨 이유는 고려와 조선이 토지를 매개로 한 봉건제 사회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Ⅰ. 고려와 조선의 사회적 특징
고려의 건국과정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계실 테니까, 바로 고려의 사회적 특징을 검토해 봅시다. 고려사회는 사회ㆍ경제적인 측면에서 농업을 경제기반으로 하여 봉건적 대토지 소유자와 농노적 소농자 간의 생산관계로 이루어진 봉건제 사회였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유교와 불교가 공존하였는데, 유교는 치국(治國)의 도로서 통치이념, 비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았으며, 교종과 선종을 대표로 하는 불교는 수신(修身)의 도(道)로서 민간신앙을 지배하였습니다.
조선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했다는 점에서 고려와 차별성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사회체제에 있어서는 고려의 봉건제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노예제도가 잔존해 있었으며, 농민을 비롯한 생산대중은 사회적 억압과 천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농민을 비롯한 대중들의 문화생활이나 교육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고려와 조선 모두에게 있어 제도교육의 주목적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과 관리의 양성 및 민중의 교화였습니다. 따라서 농업을 비롯한 제반 기술교육 등 생산계급을 위한 교육은 장려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고려 및 조선 사회의 교육에는 결국 봉건 사회의 위계적 성격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죠.
이러한 인식을 기초로 고려 및 조선 사회의 교육적 특징을 간략하게 검토해 봅시다.
Ⅱ. 고려시대의 교육적 특징
1. 고려시대의 대표적 교육기관
1) 관학
대표적인 관학, 즉 국가의 책임 하에 설립되고 운영되었던 교육기관에는 국자감(공민왕 이후에는 성균관), 향교, 학당이 있었습니다.
먼저, 국자감(國子監)부터 살펴봅시다. 국자감은 국립최고학부로서, 성종 즉위 11년째인 992년에 창설되었습니다. 국자감은 종합대학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국자학, 대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 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입학 자격은 철저히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국자학은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제 등에게 입학이 허용되었고, 대학은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등에게, 사문학은 문무관 7품 이상의 자제 등에게, 율학과 서학 그리고 산학의 경우는 문무관 8품 이상에게 허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국자감의 학제를 규정한 [식목도감]이라는 책에는 공(工), 상(商), 악(樂) 등 미천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노비나 향촌 부곡인의 자손 등의 입학을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이만규, [조선교육사], 거름, 1988, pp.89 참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철저한 신분 계급사회였던 고려의 국자감은 귀족 자제 또는 자손을 대상으로 하는 관리양성과 봉건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개발이 주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지배 이데올로기 개발이라는 말을 다른 역사관에서 보면 학문 연구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죠).
다음으로 향교(鄕校)를 살펴봅시다. 향교는 지방에 설치되어 일종의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지방민을 교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그 창설 연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향교는 공자에게 제사 드리는 문묘를 두었고, 이를 중심으로 학문을 강론하는 명륜당이 있었는데, 이 점은 조선의 향교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향교는 크게 번성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학당(學堂)이 있습니다. 원종 11년인 1261년에 개경의 동서에 설치하여 국자감에 입학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것이 학당입니다. 이 학당은 앞에서 설명한 향교와 같은 수준 및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고려 말엽에 정몽주 대사성으로 있을 때 개경의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곳에 세워 오부학당이라고도 합니다.
2) 사학
우리 나라 역사에서 나타난 최초의 고등 사학기관은 십이도(十二徒)입니다. 국자감이 설치되고 약 60년 정도 문종 7년에 최충이 관직을 그만두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사숙(私塾)을 세웠는데, 이를 최공도(崔公徒)(文憲公徒)라고 합니다. 이 최공도의 교육적ㆍ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과거시험관을 지낸 많은 학자들이 이를 모방하여 홍문공도, 광헌공도, 남산도, 서원도, 문충공도, 양신공도, 정경공도, 충평공도, 정헌공도, 서시랑도, 구산도 등의 사학을 개설하게 되는데, 이들을 일컬어 십이도라고 합니다.
사학이 이렇게 유행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과거준비에 매우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관직으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관학들이 수학연한도 길뿐 아니라 과거 합격률도 높지 않은 대신, 과거에 높은 관직(특히 과거제도와 관련된)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던 이 십이도는 수업연한도 짧고 상대적으로 과거합격률이 높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 십이도에 들어 수학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 십이도는 국자감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고 향교가 설립되기 이전에 생겨서 고려 일대를 통하여 교육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고려말 공양왕 때에 39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됩니다.
이 십이도의 성격을 잠시 살펴보면,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수준 등이 당시 최고학부였던 국자감과 매우 유사했습니다. 다만 사학이니 만큼 관학인 국자감에 비해 비교적 실천적 윤리를 더 강조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사학으로 서당이 있었습니다. 이 서당은 최초의 본격적인 초등교육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 시대에 경당이 부분적으로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했으나, 중등교육기관이 그 중심적인 성격이었고 초등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은 매우 미약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 제도교육의 역사에서 본격적인 초등교육이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의 이 서당이었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고려시대의 서당에 관한 국내의 자료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송나라의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이라는 책에 기초해서 당시 서당의 모습을 짐작할 도리밖에 없습니다. [고려도경] 1장에는 "마을입구와 거리에 경관(經?)과 서사(書社)가 두 셋씩 서로 마주보며 서있고 민간인 자제의 미혼자가 무리를 지어 스승에게 경서를 배우며 좀 성장하면 끼리끼리 벗을 택하여 사관으로 가서 강습하고 아래로 미천한 아이도 역시 마을 선생에게 배운다"(이만규, [조선교육사Ⅰ], 거름, 1988, p. 93)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서긍의 주장으로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에 이미 상당히 많은 서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서당교육은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는데, 조선의 서당은 아마 고려의 서당과 목적, 내용, 방법, 수준 등에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따라서 고려의 서당에 대해서는 조선의 서당을 살펴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과거제도의 성격과 영향
고려시대에 나타난 또 하나의 중요한 교육적 특징은 본격적인 과거제도가 성립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통일신라 원성왕 시대의 독서삼품과도 과거제도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본격적인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시대(958년)에 중국 후주(後周) 사람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실시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과거제도는 원래 중국 수나라의 문제(文帝)가 나라를 통일한 후에 관제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적 전제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채택하였고 당나라가 이를 계승하여 발전시켰습니다. 고려의 과거제도는 이 중국의 제도를 모방했던 것입니다.
과거제도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참고도서들을 이용하여 공부하시길 바라며, 여기에서는 그 성격과 교육적 영향만을 간략하게 검토하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과거제도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국자감과 같은 교육기관이 관리를 양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이 과거제도는 관리를 선발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물론 좋은 측면에서 보면, 과거제도는 높은 수준의 학문(유학)을 지닌 인재를 선발하여 적절한 관직에 배치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중국의 과거제도가 그랬듯이, 고려의 과거제도 역시 지배권력체제를 강화하기 목적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겁니다. 왕권의 강화를 위해서는 관리의 양성 과정은 물론 그 선발 과정도 체계적으로 통제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관리의 양성 과정에서 전제 왕정의 통치이념(지배이데올로기)을 충분히 내면화시켜야 함과 동시에, 그것을 보다 충실하게 내면화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관리의 양성 과정에서 전제정치에 적절히 부합되는 통치이념인 유학을 주요한 교육내용으로 삼았던 것이고, 그 선발 과정에서도 유학이론과 사상을 주요한 판단 준거로 삼았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 과거제도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내면화한 사람들을 선발하기 위한 제도였으며, 그 선발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관리)에게는 사회적ㆍ정치적ㆍ경제적 지위와 권력을 보장해 줌으로써 결과적으로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제도적 장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과거제도의 영향, 특히 그 폐해를 살펴봅시다. 과거제도의 폐해에 대해서는 이만규의 [조선교육사Ⅰ](거름, 1988, pp.96-100)에 잘 정리되어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그 책을 참고하시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몇 몇 학자들의 대표적인 비판 몇 가지만을 간추려 소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폐해는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이 문제에 대해 따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먼저 중국의 사상가 임시선의 과거제도에 대한 비판을 들어봅시다. "첫째, 정부는 과거제도를 지식분자 통제도구로 삼았기 때문에 사상이 자유롭게 발전하지 못하였고 후세 학술사상 전도에 준 영향도 지극히 컸다. 둘째, 사대부 계급에 부귀ㆍ공명사상을 양성하는 일, 즉 정부는 과거제도를 이익 유인의 도구로 삼았다…. 셋째, 공허하고 아무 쓸모 없는 학문을 양성하는 일, 즉 과거교육의 유일한 의의는 시험에 필요한 지식을 주는 데 있고 문장형식의 학습에 치우쳐 진실한 학문은 포기하였다. 이렇게 얻은 학문은 도저히 썩 넓을 수 없고 공허무용한 배움이 아닐 수 없다. 넷째, 연줄을 찾아 경쟁하는 데 열중하는 나쁜 습관을 양성하는 일, 즉 사대부의 출세의 길은 관리가 되는 것인데 출세는 과거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따라서 사대부의 자제도 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경쟁으로 관리될 자격을 얻으려고 힘쓰고 시험에 합격한 뒤에는 다시 관리의 길을 경쟁하며 경쟁에 열중한 끝에 몰염치한 나쁜 풍습이 횡행한다."
이러한 과거의 폐해는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인 유형원은 "인심이 흉흉하고 풍속이 경박해지며 공허한 말과 문장이 날로 천박해지는 것은 모두 과거의 폐해이다"고 비판하였으며, 이제현은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를 뽑는 것은 광종이 글을 사용하여 풍속을 교화한다는 뜻에는 도움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오직 실속 없고 겉치레뿐인 글을 번창시켜 후세의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또한 안정복은 "광종이 중국의 풍속을 즐겨 숭모하여 단행하였으나 … 마침내 선비의 풍속이 허위(虛僞)해지고 인재가 풀이 죽었다. 전례대로 좇아 이제까지 이르렀는데도 변할 줄을 모르니 탄식하여 마지않는다"고 하였으며, 조광조는 "국가가 인재를 뽑는데 과거에만 오로지 의지하니 세상의 도리가 점점 흐트러지고 선비의 풍습은 날로 변하며, 과거과목을 배우는 자는 오직 사장(詞章)을 암기하기에만 힘쓰니 의리의 여하를 몰라서 교화가 일어나지 않고 다스리는 도가 날로 천해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 최초의 교육사가라고 할 수 있는 이만규는 "과거로 말미암아 지식은 실속 없이 겉치레만 화려하여 천박해지고, 학문은 모리와 주기의 도구로 변하고, 세상의 도리는 협잡과 부정을 변하였으며, 인재등용은 공평을 잃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과거제도는 부분적으로는 긍정적인 점도 없잖아 있었지만, 대체로 여러 측면에서 많은 폐해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지식의 내용보다는 문장의 형식에 치우쳐 자유로운 학문사상의 발전에 심각한 해를 끼쳤으며(학문의 편협성 초래), 부정부패를 양산하였고, 사대부계급의 부귀공명을 합법화시켜 주는 도구로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과거제도의 이러한 폐해와 관련해서 우리가 한 가지 고민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대학입시제도가 초ㆍ중ㆍ고등학교의 교육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대학입시제도가 초ㆍ중ㆍ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편협하게 하거나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보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기대합니다.
Ⅲ. 조선시대(19세기 근대교육 도입 이전)의 교육적 특징
조선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이만규는 태조부터 성종에 이르는 시기를 상기로, 중종으로부터 숙종에 이르는 시기를 중기로, 그리고 영조로부터 고종에 이르는 시기를 하기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편의상 유학사상기(조선초기-16세기), 실학사상기(17-18세기), 개화기(19세기∼)로 구분하고, 개화기는 근대시대로 구분하기로 하겠습니다.
1. 유학사상기의 교육
1) 유학사상기의 대략적 특징
이 시기는 유학사상의 성립 발전기로서, 활발한 유학사상 연구로 학문이 수준 높게 발달했던 시기입니다. 중기까지 엄격한 신분적 계급질서가 유지되었으며, 소수 사대부가 관직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직은 한정되어 있고 양반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함으로써, 이러한 엄격한 신분제도는 결과적으로 사회ㆍ정치적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성리학만을 지나치게 숭상함으로써 과학 및 생산기술의 발달이 제한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고증학과 서양문물이 도입되어 실증적,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되게 됩니다.
2) 대표적 교육기관
(1) 관학
첫째, 성균관을 들 수 있습니다. 성균관은 다른 이름으로 국학, 태학, 국자감, 반궁, 현관 등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성균관은 태조 7년(1398년)에 건립한 국립 최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유학이념에 입각한 학술의 연마(유교적 봉건 이데올로기 개발)와 국가 관리 양상을 주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성균관은 조선교육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관이기 때문에 참고자료로 첨부하여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4학(四學)을 들 수 있습니다. 4학은 고려의 학당이 계승된 것으로, 서울에 설치된 성균관의 부속학교와 같은 성격을 지닌 중등교육기관이었습니다. 따라서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 학제 등은 성균관과 거의 유사했습니다. 다만 성균관이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문묘를 갖추었음에 반해, 4학은 명륜당과 동ㆍ서 양재(東ㆍ西齋)만을 갖춘 순순한 교육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셋째, 향교를 들 수 있습니다. 향교는 고려시대부터 지방에서 장려되던 중등 교육기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제시한 4학과 교육수준은 비슷했으나, 4학이 순수한 교육기관이었음에 비해 향교는 교육과 성현에 대한 제사를 겸한 기관이었다는 점이 다릅니다. 따라서 향교에는 명륜당과 양재는 물론 문묘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성균관의 완전한 축소판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외에도 경연(經筵),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종학(宗學) 등 임금과 세자 및 종친을 교육하기 위한 기관도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비록 크게 중시되지는 않았으나, 역학(譯學), 율학(律學), 의학(醫學), 천문학(天文學), 지리학(地理學), 명과학(命課學), 산학(算學), 화학(畵學), 도학(道學), 악학(樂學), 자학(字學), 무학(武學) 등과 같은 잡학교육기관도 존재했습니다.
(2) 사학
첫째, 서원을 들 수 있습니다. 서원은 중등(부분적으로는 고등) 정도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그 기원은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서원의 주목적은 선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교육(先賢尊崇과 後進奬學) 그리고 과거준비에 있습니다. 서원의 특징 몇 가지를 소개하면, 첫째로 한적하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에 위치하여 학문과 수양에 적합한 환경을 갖고 있었으며, 둘째로 관학에 비해 까다로운 학령(學令)의 규제를 덜 받고 자유로운 가운데 학문과 수양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셋째로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가 공자이래 역대 유학의 성현들을 모두 제향(祭香)하는 데 비해서, 서원은 한 사람의 이름난 선현에 대해 제향했습니다. 넷째로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면서 서원이 이를 대신해서 지방의 문화와 교육은 진흥시키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원은 또한 다음과 같은 중요한 폐단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지나치게 많은 서원들이 마구잡이로 설립되어 향교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둘째, 학문 장려를 위해서 국가가 제공한 각종 특권을 악용하여 군역과 부역을 피하려는 자들의 도피처가 되었습니다. 셋째, 적당한 스승이 없어 모여서 잡담이나 즐기며 놀고먹는 자들의 집합소가 된 곳도 적지 않았습니다. 넷째, 민중 위에 군림하여 그들을 착취하고 횡포를 부리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다섯째, 중앙에 정쟁이 생기면 서원이 이에 가담하여 당쟁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폐단들은 조선 말기 고정 8년(1871)에 대원군이 전국의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모두 폐쇄해 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박의수 외, 앞의 책, pp.79-80).
둘째, 서당이 있습니다. 서당은 고려시대에도 매우 발전되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여 그 수로 보더라도 가장 많고 생명력도 가장 긴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서당은 전적으로 사설 교육기관이며, 그 설립과 폐지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뜻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서당을 설립하여 경영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규모와 수준과 성격도 매우 다양했습니다. 서당은 평민에게도 입학을 허용하였으며, 학문과 생활윤리 교육을 그 주목적으로 하였습니다. 고려와 조선 민중의 지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다른 어떠한 교육기관보다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서당은 교육사적으로나 민족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중요성을 고려해서 참고자료로 첨부하여 보다 자세히 소개합니다.
2. 실학사상기의 특징과 교육사상
1) 실학사상기의 시대적 상황
실학사상이란 조선 후기 영ㆍ정조 시대 이후에 양심적인 학자 지식층을 중심으로 나타난 일정한 역사적 시기의 학문적 경향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집권층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집권층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주자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실학사상가들은 주자학이 모화사상, 당쟁, 가족주의, 계급사상, 문약(文弱), 산업능력의 저하, 숭명주의, 복고주의, 무사안일주의 등과 같은 폐해를 가져왔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주자학의 대안으로 제시한 새로운 유학의 성격은 한마디로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용후생(利用厚生), 실사구시(實事求是) 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학사상이 영ㆍ정조 시대에 나타나게 된 것은 당시의 몇 가지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서학의 전래를 들 수 있습니다. 16세기 초 서양의 종교개혁 이후 로룔라(I. Royola)에 의해 설립된 제수잇 교단은 서구에서의 구교의 열세를 동양에서 만회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기 시작했는데, 그 영향으로 조선에도 기독교와 더불어 여러 서구 문물과 사상이 유입되게 되었습니다. 특히 천주교 서적은 남인 학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켜 그들의 사상에 커다란 변혁의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둘째, 고증학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청나라에서는 명나라 말기 양명학에서 탈피하여 실증적으로 유학의 참 뜻을 찾으려는 고증학적 방법과 실사구시의 학문태도가 일어났는데, 이를 고증학이라고 합니다.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 사대의 대상이 명으로부터 청으로 바뀌게 되자 자연히 청과의 접촉이 잦아지게 되었고, 신진 학자들에게 그러한 학문적 태도를 수용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셋째, 조선 내부의 정치ㆍ사회적 변화입니다.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계급 질서는 조선 중기 이후 관리 후보자인 양반의 수는 급증하는 반면에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서 사대부 계층의 치열한 경쟁이 야기되었고, 이는 곧 당쟁과 사화로 격화되었습니다. 치열한 정쟁 과정에서 승자는 특수 집권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패자는 영원한 몰락계층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삼남지방(三南地方)의 선비들은 일찍이 벼슬을 포기하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농토를 보유하고 중소 지주로서 양반의 신분을 누리면서 안정된 삶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권력에서 밀려난 서울과 경기 지방의 양반 선비들은 신분은 양반이지만 경제생활은 오히려 농ㆍ공ㆍ상에 종사하는 평민들보다 나을 것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처지에 있었던 선비들은 다른 지방의 선비들보다 앞서서 자신의 문제와 더불어 정치ㆍ사회적 현실의 개혁과 농ㆍ공ㆍ상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아가 자아의 각성을 바탕으로 민족문화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실증적 정신을 바탕으로 사물에 대한 객관적 고찰이 가능했던 것입니다(박의수 외, 앞의 책, pp.95-96 요약).
2) 실학사상의 주요 내용
첫째, 실학사상가들은 주자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식산흥업, 이용후생, 경국제민 등의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였습니다.
둘째, 국내 실정을 사실에 입각하여 연구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와 지리ㆍ자연과 산물을 연구하고, 주체적ㆍ자주적 학문 연구를 통해 학문의 획기적 전환을 꾀하고자 하였습니다.
셋째, 고증학, 자연과학 등 우수한 외국문물과 근대적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입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넷째, 신분제도의 철폐를 주장하였습니다.
3) 대표적 실학사상가의 교육사상
실학사상가들 중에서는 매우 중요한 교육사상가들이 많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지면관계상 대표적으로 유형원, 이익, 정약용의 교육사상만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우리 나라 교육사상가들, 특히 실학사상가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하시길 바랍니다.
(1) 반계 유형원(1622-1673)
첫째, 종래의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학교교육을 통하여 능력 있는 인물을 관리로 등용할 것을 주장.
둘째, 근대적 학제의 도입을 제안.
셋째, 학교 입학 자격을 사대부에만 국한하지 말고, 서얼과 서민의 자제에게도 부여할 것을 제안.
넷째, 사대부의 관직 세습화를 억제하고 인재 등용의 기준을 문벌보다 개인의 능력에 둘 것을 주장. 학교교육에서도 문벌보다는 나이와 능력에 따라 차례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
다섯째, 이상적 교육적 인간상은 덕행인(德行人)과 능력인(能力人)으로 보고, 신분을 초월하여 교육의 기회를 균등히 해야 한다고 주장.
(2) 성호 이익(1681-1763)
첫째, 민족 주체의식을 강조. 교육과정에 [퇴계집]과 [동국사]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
둘째,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은 예의를 숭상하는 데 있다고 보고, 교육에서 숭례(崇禮)와 근검(勤儉)을 강조해야 함을 주장.
셋째,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능력에 따른 개인차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
넷째, 교육방법과 관련하여 탐구심의 계발이 자기계발의 요소이며, 자기수양의 방법으로 매일 새롭게(日新) 스승을 구하고(得師),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즐겨 질문하는 것(好問)이 참다운 살아있는 교육이라고 주장. 특히 강의식이나 맹목적인 아미보다 질의응답을 중시. 교육에서의 지행합일을 강조.
(3) 다산 정약용(1762-1836)
첫째, 실사구시의 강조. 다산은 공리공담의 이기설(理氣說) 경전의 자의나 음훈에 빠져버린 훈고학(訓?學), 미사여구의 문자적 유희인 문사(文辭), 과거제도 및 우민을 현혹시키는 도선비결(道詵秘訣) 혹은 정감록(鄭鑑錄) 등 다섯 가지를 버려야 할 구습이라고 보고, 이들은 실사구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
둘째, 교육적 인간상으로 수기위천하인(修己爲天下人)을 제시(자기 수양에 의해 능력을 닦고, 이것을 천하와 국가를 위해 실천하는 사람으로, 현대적 의미에서 볼 때 社會的 自我實現人이라고 할 수 있음).
셋째, 감각기관을 활용한 과학적, 실천적 교육방법의 제시.
4) 실학사상의 교육사적 의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실학사상은, 서양의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르네상스에 맞먹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 민족 근대화의 시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실학사상은 사회ㆍ정치적 상황의 미성숙, ② 일부 학자들 중심의 운동, 해당 학자들의 정치권력의 미약 등과 같은 이유로 인해 그 크고 귀한 뜻을 만족스럽게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학사상은 교육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교육이념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점입니다. 실학사상가들이 주장했던 신분을 초월한 교육의 기회균등 사상과 민본주의적 개인차의 중시 등은 현대의 보편적 교육이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과거제도의 폐단을 비판하고 다양한 대안을 모색했다는 점입니다. 고려사회에 대해 설명할 때 이미 말했듯이, 과거제도의 폐해는 한 두 마디로 지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고도 다양합니다. 또한 고려나 조선의 과거제도가 갖고 있던 문제들은 아마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거제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실학사상가들의 노력은 교육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셋째, 민족주체성의 제고를 들 수 있습니다. 실학사상가들은 대부분 우리 민족의 지리나 산물, 사회 실정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강조했으며, 이익은 [퇴계집]과 [동국사]를 읽도록 권장했으며, 박지원은 [천자문]이나 [사략]과 같은 중국의 문자와 역사를 교육 입문서로 읽히고 있는 실정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은 모두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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