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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강의


근세사회의 교육2

- 서양 18~19C, 조선 개화기



Ⅰ. 18∼19세기 서양사회의 교육적 특징

Ⅱ. 조선 개화기의 교육적 특징

이번 강의에서는 서양 18∼19세기 사회, 즉 근대 후반기와 조선의 근대화가 진행되던 개화기의 교육적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서양 18∼19세기는 지난 시간에 검토했던 15∼17세기와 마찬가지로 현대 사회로의 전환기 또는 이행기적 성격을 지닌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Ⅰ. 18∼19세기 서양사회의 교육적 특징


1. 서양 18세기의 교육

(1) 사회적 배경

먼저 18세기를 전후한 시대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이 시기는 영국의 명예혁명(1688), 미국의 독립(1776), 프랑스 혁명(1789) 등과 같은 시민혁명이 일어났던 격동의 시기로서, 중세적 특징을 지닌 사회가 해체되고 근대 시민사회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중세 말엽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시민세력이 위의 몇 가지 시민혁명을 계기로 비로소 완전한 역사의 주인으로 등장한 셈이죠. 이 시민혁명들은 모두 17세기에 성립되어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절대주의 왕정에 대한 저항과 반발로 발생하였습니다. 절대왕정은 일종의 세속화된 봉건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 천년간을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세력에 숨죽이고 있던 세속적인 지배세력이 중세 봉건사회의 약화를 틈타 시민세력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점차 확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이미 지난 시간에 언급되었습니다. 바로 그 세속적인 지배세력이 절대권력을 확보하여 민중 위에 군림했던 것이 이 절대왕정입니다. 당시의 시민세력은 중세 잔재인 독재적 전제정치에 대항하여 그 절대왕정을 타도함으로써 자유롭고 평등한 근대 시민사회를 건설하게 됩니다. 즉, 중세적 몽매성이 깃든 구체제(앙시앙 레짐)을 타파하고 시민혁명을 통하여 신체제를 수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민혁명에 정신적 기초로 작용한 사조가 있었는데, 우리가 흔히 계몽주의라고 하는 사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계몽주의자들은 근대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중세적 몽매성이 제거되어야 하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야말로 인간적 삶의 궁극적 판단자요 지도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세적 잔재인 절대주의가 이들에게 타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죠.

결론적으로, 14∼15세기의 르네상스를 통해 싹트고, 16세기의 종교개혁기 이래 본격적인 발전을 이룩한 유럽의 근대적 발전, 즉 인간중심의 사고를 바탕으로 전개된 근대화는 18세기의 계몽시대에 이르러 미국의 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으로 완성단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절대주의와 교육

절대주의 국가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체제 지탱하기 위해 중간 관리기구로서의 성격을 갖는 관료기구 뿐만 아니라 대외적인 국가 방위와 식민지 확보, 대내적인 질서 유지 및 통일 등을 위해 상비군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전제체제에 국민의 의식을 순응시키기 위해 강력한 국민교육 정책을 채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으로 인해서 교육의 주도권이 교회로부터 국가로 이관되었으며, 학교제도는 국가관료와 상비군의 간부 양성을 위한 중등교육제도가 중시되는 대신 상대적으로 서민교육제도는 경시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서 복선형 교육제도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국가가 주관하는 교육의 목적은 당연히 부국강병과 국가에 충성스러운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었으며, 주요 교육내용은 주로 왕권에 대한 충성심과 기능, 실과, 수학 및 근대적 언어 등과 같은 실질적인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3) 계몽사상과 교육

다음으로 절대주의 왕정에 대항해서 나타난 계몽주의적 교육을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절대주의 왕정은 중세 봉건제도의 잔재라 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은 중세 말 또는 근세 초에 교회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세속왕권의 강화에 협조적이었으나, 절대왕권의 횡포가 심각해지자 그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형성하게 됩니다. 즉, 중세적 무지몽매 상태에서 벗어나 인간 이성의 해방을 기치로 계몽사상이 형성됩니다. 계몽주의적 사고 경향을 갖고 있던 당시 시민들은 이성, 합리적ㆍ과학적 사고를 무기로 정치ㆍ경제체제로서의 전제군주제, 신분 계급주의적 사회체제, 사상 및 신앙의 통제 등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그리하여 이 시대를 일컬어 '이성의 시대'라고 지칭합니다.

이러한 사고경향은 당연히 교육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즉, 계몽사상가들은 교육을 통해 중세적 구습과 구폐를 타파하고, 이성적ㆍ합리적 사회 건설을 꾀했던 것이죠. 그리하여 계몽주의적 교육은 궁극적으로 이성의 해방, 즉 합리적 사고 능력을 길러 이성의 자유를 속박하는 종교, 정치, 제도 등 모든 억압적 권력구조를 제거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철학, 과학, 정치, 경제, 문학, 사교상의 예법 등과 같이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사고를 길러주는 과목이 주요 교육내용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또한 방법적인 측면에서 냉철한 비판적, 논리적, 분석적 사고를 중시하였습니다.

계몽주의 사상이 교육적으로 많은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실제 생활에 유용한 실제적 생활기술을 무시하고, 서민 또는 민중들을 위한 교육보다는 인텔리겐차만을 위한 교육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한계도 있습니다. 이성, 합리성, 과학성만을 강조하다 보니 당연히 이성을 신성화하고, 역으로 인간 본성의 또 다른 측면인 감성이나 정서, 도덕성 등은 경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결과적으로 실용적ㆍ실제적 지식보다는 지식 그 자체를 위한 지식, 자기 과시와 지적 허영ㆍ사치를 위한 지식만을 중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계몽주의 교육사상에 반발하여 인간의 정서, 감성, 자연성 등을 강조하는 자연주의 교육사상이 대두됩니다.

 (4) 자연주의 교육사상

앞에서 지적했듯이 계몽사상은 지나치게 이성만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의 존엄성과 감성, 인간성 등을 경시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계몽주의의 이러한 편협한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자연주의가 형성됩니다. 물론 이 자연주의는 단순히 계몽사상에 대한 반발로만 대두된 것이 아닙니다. 중세의 봉건제도 못지 않게 인간성을 파괴하고 왜곡하던 당시의 절대왕정 역시 자연주의 사상을 역사 현실에 나타나게 했던 중요한 요인일 것입니다. 자연주의 교육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합자연의 원리입니다. 즉,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삶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여기고, 따라서 교육 내용과 방법의 측면에서도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교육을 주창했습니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자연주의의 교육목적은 개인적인 측면에서 개인의 천부적 권리를 보존하고 자연이 준 선한 상태를 보존하는 것이었으며, 사회적 측면에서는 자유, 평등, 박애(천부적 권리)를 만인이 누릴 수 있는 사회, 즉 개인의 자연성을 보장해 주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주의는 감각이 발달하는 어린 시기에는 주로 자연적인 사물들을, 그리고 사회성, 이성 등과 같은 고차원적 능력이 발달하는 청소년 및 성인기에는 철학, 윤리, 종교 등과 같은 과목을 주요한 교육내용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방법, 자발성을 계발할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한 것과 그 맥락을 같이 합니다. 결론적으로 자연주의는 합자연의 원리에서 시작하여 합자연의 원리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자연주의는 교육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육의 심리학적, 과학적, 사회학적 기초를 제공했으며, 정치적으로는 프랑스 혁명과 현대 민주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세도우, 페스탈로찌, 프뢰벨, 몬테소리, 엘렌 케이, 니힐, 듀이 등과 같은 유명한 교육사상가들도 바로 이 자연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자연주의 교육사상의 대표적인 인물인 루소에 대해서는 참고자료로 제시해 드릴 예정이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시의 실제적인 교육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참고도서들을 통해 더 자세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예전에 소개해 드렸던 우메네 사토루의 [세계교육사]는 당시의 교육 상황을 사실적으로 잘 묘사해 주고 있으니 읽어보시면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2. 서양 19세기의 교육

(1) 사회적 배경

어떤 학자가 19세기를 일컬어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즉, "19세기의 한 세기 동안의 문화 및 사상의 발전은 지나간 18세기 동안의 그것보다도 크고 많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몇 가지만 살펴보면 이러한 주장이 매우 타당하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정치적 측면에서 19세기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의 혁명을 기점으로 민주적 정치제도가 수립되었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산업혁명을 계기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발달하였습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고 볼 때, 19세기는 현대 사회와 그 근본적인 성격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세기는 문화ㆍ사상적인 측면에서 신인문주의가 대두되었으며, 교육적으로 국가주의와 계발주의가 대두되었습니다. 국가주의 교육은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발달과, 그리고 계발주의 교육은 민주주의와 신인문주의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볼 때 19세기가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던 시기라고 하는 주장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하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19세기의 교육적 특징을 검토해봅시다.

 (2) 국가주의 교육

19세기는, 라폴레옹의 침략 전쟁에서 나타나듯이, 여러 국가들이 자국의 세력강화를 위해서 국민에 대한 보다 철저한 국가 관리가 요구되었습니다. 동시에 산업혁명으로 인해서 일정한 기초적 능력을 지닌 수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요구되었습니다. 이러한 국가ㆍ사회적 필요성에 따라 각 국가들은 교육을 직접 관리하려고 하는 경향을 지니게 되는데, 이러한 경향을 일컬어 국가주의 교육이라고 합니다. 즉, 근세사회의 교육적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개인 또는 특정 사회계층의 필요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점인데, 19세기에는 국민에 대한 교육을 국가가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려는 경향, 즉 국가적인 학교제도나 의무교육제도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개인이 책임지던 교육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교육으로 전환시켜 교육의 공교육화, 대중화에 기여하였습니다. 따라서 국가주의는 보다 많은 서민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교육의 민주화, 평등화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교육을 국가 발전과 자본 창출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데에도 크게 한 몫 하였습니다. 어쨌든 현대 사회의 중요한 교육적 특징인 대중교육, 의무교육제도 등은 19세기 국가주의 교육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계발주의 교육

국가주의가 교육제도 등과 같은 교육의 외형적 측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면, 당시의 계발주의 교육은 교육 내적인 측면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계발주의란 교육은 외부로부터 성인의 표준을 강제 주입하는 대신에 내부로부터 아동의 자연스런 발달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조로서, 신인문주의라고도 부릅니다. 이념적으로 볼 때 18세기의 계몽주의와 자연주의의 조화 또는 결합을 추구한 사조가 아닌가 합니다.

계발주의의 교육 목적은 머리와 마음과 몸의 조화로운 계발에 있습니다. 즉, 지식 또는 이성적 능력과 도덕성, 그리고 건강을 조화시켜 인간을 완성하자는 것이 계발주의 교육이 궁극적으로 추구한 목적입니다. 특히, 아동의 선천적인 능력을 계발하기 위해서 활동중심적 교육과정을 강조하였으며, 주요 과목으로 독서, 습자, 산수, 과학, 지리, 역사, 어학, 문학, 유희, 음악, 작업, 미술 등 다양한 과목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교육방법으로는 아동의 흥미와 능력을 중시하고, 아동의 직접적인 창작활동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성인 중심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아동 중심의 자율적 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러한 계발주의 교육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동은 성인의 축소판이 아닌 그 자체로서 존엄한 존재이다.

둘째, 교육은 아동의 심리적, 신체적 상태를 중시해야 한다.

셋째, 교육의 과정은 자연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

넷째, 흥미와 노력은 상호 보완적 관계에 있다.

다섯째, 교육은 발전의 과정이며, 그 과정의 초기인 유아, 아동기의 교육이 매 우 중요하다.

이러한 계발주의는 교육 외적인 측면보다 내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학습지도법의 개선, 교사양성의 중시, 교육내용 선정 등에 있어 많은 발전을 가져왔으며,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페스탈로찌, 헤르바르트, 프뢰벨 등을 들 수 있습니다(페스탈로찌, 헤르바르트, 프뢰벨의 교육사상은 참고자료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Ⅱ. 조선 개화기의 교육적 특징


1. 19세기의 사회적 배경

19세기 조선 봉건사회는 그 사회적 모순이 더욱 첨예하게 드러나 한 마디로 '체제의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탐관오리의 수탈과 지배계급의 학정이 날로 심화되었으며, 가뭄으로 인한 흉년과 농촌의 황폐화로 인해 농민들의 삶은 더욱 곤궁한 상태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당시의 정부에 대한 백성들의 불신은 날로 팽배해 갔습니다. 또한 외적으로는 서양에서 들어 온 천주교가 지속적으로 그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고, 서양선이 출몰하여 지속적인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중국을 통해 들어 온 서양과학문물과의 접촉이 갈수록 확대되어 갔으며, 강대국들은 여러 측면에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음모를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러 내ㆍ외적 상황으로 인해 조선 19세기를 '체제 위기의 시대'라고 규정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19세기 조선은 내적으로 강력한 사회개혁이 요구되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19세기 조선에 동학사상과 개화사상이라는 사회개혁사상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은 교육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19세기를 대표하는 교육적 특징으로 동학교육사상과 개화교육사상을 간단히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2. 동학사상의 교육적 특징

(1) 동학의 사상적 특징

먼저 동학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봅시다. 첫째로, 동학사상은 인내천사상입니다. 즉, 인간이 바로 하늘이라는 인간제일주의 또는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곧 모든 인간은 하늘과 같아서 모두 평등한 존재이며, 따라서 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평등주의 사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지배계급이 동학세력의 확산을 외세의 힘을 빌어서까지 저지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평등사상 때문입니다. 고려로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배이념으로 자리잡고 있던 유학사상도 어떤 면에서 보면 인본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긴 합니다. 그러나 유학사상은 그 본질적인 성격상 계급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평등사상으로는 연결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동학사상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따라서 당시의 계급적 신분질서는 당연히 타파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동학사상은 이러한 평등사상적 성격으로 인해서 억압과 수탈에 지친 민중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당시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동학사상은 개혁사상입니다. 동학사상은 공리공담에 매몰되어 있는 허구적인 성리학을 타파하자는 정신개혁사상이며, 외세에 맞서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민족개혁사상이며, 계급적으로 위계화된 사회구조를 개혁하자는 사회개혁사상이었습니다. 결국, 동학사상의 본질은 인간중심, 민중중심의 평등사상이요 사회개혁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동학사상의 교육적 의미

교육적으로 볼 때, 이러한 동학사상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본적 평등주의 교육사상입니다. 왜냐하면 조선의 계급적 불평등, 성적 불평등을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양 근대 및 현대 사회의 교육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는 민주주의 교육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신분과 성적 차이와 무관하게 모든 이들에게 균등하게 교육받을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사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셈이죠. 우리가 서양의 교육사상을 직접적으로 수입하기 이전에 우리 역사에도 이렇게 훌륭한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동학사상은 도덕적 사회개혁 교육사상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동학사상은 혼돈과 부패가 극에 달한 사멸 직전의 사회를 도덕적으로 개혁하고자 하는 사상이며, 그 개혁의 주체를 다름 아닌 민중으로 상정하고, 민중의 교화와 교육을 강조하는 민중교육사상이었던 것입니다. 셋째로, 동학사상은 주체적 민족주의 교육사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학이라는 말 자체 속에 외세를 의미하던 서학에 대한 대립적인 성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동학의 민족주의 사상은, 대원군과 같은 당시 지배세력이 지니고 있던 폐쇄적 민족주의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근대적 민족주의 사상입니다. 즉, 주체적이며 개방적인 개화민족주의 사상인 것입니다.

동학혁명의 실패로 인해서 인본적 평등주의 사상, 민주주의 사상, 민족주의 사상, 사회개혁사상인 동학사상 역시 빛을 크게 보지 못했지만, 보다 많은 연구를 통해서 그 역사적 전통을 복원하고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발전시킬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것입니다.

3. 개화사상기의 교육

이 시기는 조선말 오랫동안의 쇄국 정책으로 인해 국제정세의 흐름에 어두어 근대 과학문명의 도입을 통한 근대화에 뒤떨어진 탓으로, 서구적 근대화에 한발 앞선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개방과 이를 계기로 밀어닥친 서구의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저항과 수용과 충격의 시기였습니다. 더욱이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은 오히려 집권층의 분열만 가중시키고,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 야욕에 희생양이 될 수밖에 벗는 운명을 재촉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육열이 강하고, 새로운 문물의 수용과 흡수에 적극적인 우리 민족은 새로운 문화의 수입과 지적 욕구를 자극 받자 잠재되었던 교육에 대한 욕구가 빠른 속도로 증폭되어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근대적인 학교의 설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특히 서양의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 설립은 민족 선각자들을 자극하여 우후죽순 격으로 사립학교의 설립을 통한 교육 구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거대한 제국주의의 침략 세력에 힘없이 굴복하여 주권 상실의 비운을 막지는 못했지만, 개화기에 점화된 교육의 열기는 계속 식지 않고 지속되어 국민을 각성시키고 민족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원천이 되었습니다. 특히 민족 선각자들에 의한 사학의 설립은 많은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역사와 독립정신을 고취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에 끈질긴 저항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게 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한편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한 학교의 설립은 물론 그들의 입장에서는 교세의 확장과 그들 정부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긴 하지만, 우리 나라에 서양식 교육제도와 신학문을 소개하고 현대식 교육방법을 도입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계급과 남녀를 초월한 평등한 교육기회의 확대를 촉진하는 데 기여했으며, 직업의 귀천의식을 불식시키고 노동의 신성함과 경제적 자립정신을 가르쳤으며, 새로운 과학기술 교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근대적 교육과정의 도입과 정규교과 이외의 과외활동에 대한 교육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우리 나라 교육 근대화를 촉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박의수 외(1998), [교육의 역사와 철학], 동문사, pp.132∼133).

우리 나라 근대사회의 교육사상과 교육운동을 자세히 공부하고 싶으신 분은 아래의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윤건차 저ㆍ심성보 역(1987), [한국근대교육의 사상과 운동], 청사출판사(청사신서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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