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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코메니우스
(J.A.Comenius, 1611∼1670)
과학적(감각적) 실학주의의 대표적 사상가인 코메니우스에 관련된 참고자료를 소개합니다. 그는 체계적인 교육학 저술을 처음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초등교육 또는 민중교육에 방법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준 사상가입니다. 루소, 프뢰벨, 니힐, 듀이 등과 같은 걸출한 교육사상가들도 코메니우스의 영향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사상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수업시간에 소개할 만한 여유가 없어 참고자료로 제시하는 것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에 제시한 자료는 우메네 사토루 지음, 김정환 외 옮김, [세계교육사](풀빛, 1994)의 251∼161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 연금술적 교육학 :
독일의 철학자 수프랑거는 [독일 초등학교사에 대하여]라는 글 속에서 17세기의 독일 교육학자는 ― 그 대표는 코메니우스이다 ― 당시 유행하던 연금술사와 비슷했다고 말하고 있다.
상당히 재미있는 표현이다. 결국 연금술사가 근처에 널려 있는 하찮아 아무도 돌아다보지 않는 돌멩이나 광물에서 금이나 은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세상사람들이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는 어린이의 교육이라는 것으로부터 황금과 같은 이상사회가 생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연금술적 교육학이라는 것은 실은 17세기의 독일에 한정되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교육에 의해서 사회가 개조 또는 변혁되고 유토피아가 실현된다는 생각은 많든 적든 오늘날의 소위 진보적인 교육학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며 그 신념 때문에 교육에 실로 커다란 의의와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교육만으로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17세기의 연금술과 마찬가지로 결국 실패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므로 그러한 독선적인 교육만능론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이 사회개조에서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오히려 최근에 이르러 점점 광범하게 인식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17세기에 시작한 '연금술적 교육학'이라고 하는 것은, 청소년의 교육을 정치의 문제, 사회개혁의 문제와 결부시켜서 생각하는 교육문제에 대한 현대적인 취급방법의 선구를 이루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교육연금술사 중 최대 거장은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였다.
- 코메니우스 :
코메니우스는 원래 독일인이 아니었다. 보라비아에서 출생한 체코인이었으며 체코어를 모국어로 하고 일생 동안 체코어와 라틴어로 글을 썼던 사람이다.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역을 옛날부터 슬라브계 체코인이 살고 있던 땅이었으나 여기에 13, 14세기경에 독일 상인이 들어와서 이 지방의 금ㆍ은광의 개발에 착수했다. 그 이후 이 지방은 남부독일의 상인과 그들을 배경으로 한 독일 황제의 돈줄이었다. 그런 만큼 문화의 정도도 높아서 1348년에는 황제 카알 4세에 의해 이 지방의 수도 프라하에 독일 최초의 대학이 창설되었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가장 유서 깊고 내용이 높은 대학으로서의 전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와 문화는 완전히 독일인의 손에 지배되고 있었다. 광산의 경영자는 거의 모두 독일인이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하다고 하던 보헤미아 본산사원도 모두 독일인의 수중에 있었다. 프라하대학은 볼로니아와 파리를 모방하여 학생자치조합을 만들었는데 그 조합의 단위단체는 국적별의 소위 네이션이라는 관계를 따른 것을 그 네이션을 독일인 학생은 3개를,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인은 하나를 만들게 해서 최고 의결기관인 네이션의 대표자회의에서 투표는 3 대 1로 독일인 학생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런 독일 자본과 여기에 편승한 독일인의 횡포, 특히 체코인을 종속국민화한 합스부르크 정권에 대항하여, 여기서는 일찍부터 반독일적인 민족운동의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14세기경에 씌여진 [보헤미아 연대기]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보헤미아인이여, 독일인의 지배하에 종속되지 않도록 경계하라.(…) 황제 카알 4세는 물론 보헤미아를 개발했다. 프라하 시를 확대하고 프라하의 학문과 문화를 향상시킨 점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도처에서 오직 독일인의 이익을 위한 일만을 했다. 보헤미아의 모든 도시에서 시장, 시평의회 의원직에 있는 자는 도대체 어느 나라 인간인가? 가로되 독일인이다. 사법관은 어떤가? 가로되 독일인이다. 독일인이 설교를 듣는 곳은 어디인가? 가로되 본산사원이다. 보헤미아인은? 가로되 교수사원의 앞마당과 민가다. 이처럼 모름지기 황제가 보헤미아를 제것이라 하고 보헤미아인을 멸망시키려고 획책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확실히 보헤미아인은 황제 하에서는 의사당에서 하는 토론조차도 모국어로 하지 못하고 독일어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반독일 운동의 기운은 이윽고 유명한 요한 후스의 종교개혁운동(1411)으로 폭발했다. 그리고 그것은 1414년 7월 후스가 살해된 뒤에도 계속되어 1419년 7월에는 프라하 시가 보헤미아인에 의해 점령되는 사건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카알 황제는 누차에 걸쳐 군대를 투입하여 이 반카톨릭, 반독일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탄압하에서 그들은 각지에 반카톨릭적인 신앙단체를 만들어 저항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교단의 하나가 나중에 코메니우스가 최후의 지도자가 되었던 보헤미아 동포교단이다.
이 교단은 교육교화에 대단히 열심이었다. 16세기 초 무렵 온 보헤미아에 있던 다섯 개의 출판소 가운데 세 개는 교단이 경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요컨대 후스의 교의에 따른 교의문답서를 만들고 그것을 인쇄하여 어린이들에게 가르쳤다. 16세기 초 교단의 종교회의는 "자녀를 훈육하여 신앙심을 갖게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이다"라고 결의하고 있다.
반독일, 반카톨릭 운동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에 잇따른 종교전쟁에 자극 받아 이윽고 1618년 보헤미아인 귀족은 합스부르크 가(독일 황제로서 보헤미아 왕을 겸한다)에서 이탈할 것을 기도하여, 당시 신교연합운동의 수령으로 추대되고 있던 칼뱅파의 선거제후 프리드리히를 받들어 민족독립운동으로 나아갔다. 합스부르크 가의 당시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군대를 투입하여 이 독립군과 싸웠는데, 1620년 바이젠회전에서 독립군은 대패하고 보헤미아의 귀족은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운동의 정신적 모태로서 지목된 보헤미아 동포교단도 해산을 명령받았다.
이것은 독일의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이것을 계기로 신교 제 영주의 연합군과 카알 황제 사이의 격렬한 내전이 계속되어 1648년의 베스트팔렌 전쟁까지 30년 동안 피투성이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30년 전쟁 중에 보헤미아인은 신교군의 승리에 의한 조국 보헤미아의 해방을 꿈꾸었지만 그것은 결국 허망한 기대로 끝났다.
1620년의 이 바이젠 패전 때 코메니우스는 29세로 훌네크에서 동포교단의 목사직에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교단이 설립한 학교의 교장직에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1621년에는 카알 황제의 군대가 훌네크 시에 침입하여 시가지에 불을 질렀다. 물론 교단의 사원도 자신의 집도 모두 재로 변했다. 이때부터 코메니우스는 일생 동안 국내와 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후 그의 생애를 일관하는 염원은 조국과 교단의 부흥이었다. 그리고 어린이의 교육은 이를 위한 기초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것을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국에서 교회와 학교가 비참하게 몰락하는 것에 직면하여 나는 대단히 마음이 아팠지만 동시에 또 신의 자비는 반드시 우리들에게 다시 향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몰락한 조국을 구제할 방책을 열심히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가 도달한 결론은 우선 어린이들을 위하여 빨리 학교를 세우고 여기에 좋은 책과 훌륭한 교수법을 제공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과학적, 도덕적 및 종교적 노력을 기울여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 범지식체계 :
이렇게 해서 그의 주저이며 교육학사상 최초의 체계적인 교육학서라고 하는 저 [대교수학](1632)이 탄생되고 또 [어학입문](1631) 등 유명한 교과서가 쓰여졌던 것이다. 그것은 조국해방을 위하여 조국의 어린이를 '좋은 책과 좋은 교수법'으로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코메니우스는 이윽고 좁은 조국주의로부터 넓은 세계적 시야로 옮겨갔다. 1630년대에 들어 영국의 하트리브와 기타 평화주의자와 교제하면서 그때부터 그후 반생의 집념이었던 범지체계(汎知體系, Pansophia)의 완성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판소피아(범지체계)라는 것은 코메니우스 자신이 "진, 자연 및 인간사에 관한 참된 지식의 모든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처럼 당시 종교계에서는 신교 제파와 구교가 대립하고, 한편에서는 자연과학이 발흥하여 과학적 세계관과 종교가 모순하고, 정치에서는 격렬한 국제전쟁이 끊일 날 없는 혼란의 시대에서 이런 문제에 대한 정확하고 통일적인 사상의 체계를 만들어서 사상계의 통일에 도움을 주려고 한 것이다.
그는 물론 조국해방이 평생의 염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결국 세계(유럽)의 정치개혁, 국자간의 국제관계의 정의에 기초한 변혁, 궁극적으로는 세계국가(유럽연방)의 실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로운 세계국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그러한 이상에 기초한 통일된 사상과 지식의 체계를 완성하고 그것을 학교를 통해서 공통의 언어로 전세계의 민중에게 널리 가르치지 않으면 안된다. 신의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평화로운 세계국가를 실현할 필요와 가능성을 널리 인류에 알리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세계의 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보편적인 사상(판소피아, 범지)을 보편적인 언어(국제어)에 의해 보편적인 교육을 통해서 전 민중에게 가르치는 교육이야말로 이상세계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믿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는 세계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적 사업인 범지체계(그것은 곧 학교의 커리큘럼이다)와 그것을 가르치는 방법의 완성에 정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최선의 것을 동경한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만인에게 모든 진리를 충분하고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모든 잘못된 생각은 만인이 싫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또 만약 우리가 참된 종교란 무엇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종교는 만인이 싫어하는 바가 될 것이다. 만약 또 우리가 참된 자유가 무엇인가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일체의 전제와 압제(잘못된 정치)는 만인에게 구토를 일으키게 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지 우리가 바라는 것, 우리가 이룩할 수 있는 것, 즉 하나의 신앙, 하나의 사상에 의한 평화로운 세계국가는 어떤 것인가를 아는 데 있다."
- 교수법 개혁론 :
이러한 주지적인 사회개량론은 서면 당연히 '학교'라는 것은 절대적인 사회적 사명을 갖는 것으로 크게 부상하게 된다. "모든 정치문제의 근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육이다"라든가, "교육은 단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문제이다. 아니 단지 많은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한 도시, 한 지방, 한 나라, 나아가서 전 인류의 행ㆍ불행에 관한 문제이다"라는 말은 이러한 교육의 사명관을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사명관에서 출발하면 학교는 당연히 공영으로 전국민의 취학을 원칙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코메니우스의 정연한 학교계통론이 나온다. 그는 학교를 출생부터 만 6세까지의 모친학교, 만 6세 이상 12세까지의 6년제 국어학교, 12세 이상 18세까지의 6년제 라틴학교, 18세 이상 24세까지의 6년제 대학이라는 4단계의 단선형 계통으로 구상한다. 국어학교의 6년간은 남녀의 구별 없이 모든 어린이가 여기에 입학해야 하며 또 국어학교는 마을에, 라틴학교는 도시 및 지방에, 대학은 국가에 각각 공금으로 설립하고 유지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특히 국어학교에 대해서는 상층계급의 자녀는 처음부터 라틴어 문법학교, 하층계급의 자녀는 허술한 간이 국어학교에 입학시키는 당시 일반화되어 있던 풍습에 강력히 반대하여, 모든 계급의 자녀는 모두 똑같이 국어학교에 입학시킬 것(오늘날 단선형학교 또는 통일학교라고 불리고 있다)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교육의 목적인 전인간을 인간성에 이르기까지 교육하는 데 있는 이상 모두 함께 배우고 함께 나아가고, 서로간에 협력하고 도우며 배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특히 학교를 구별하여 계급관념을 자극하고 우열감을 자아내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였다. 교육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사회의 실현을 기대하는 것인 이상, 학교는 모든 사람이 계급과 빈부의 차별을 떠나서 함께 비우는 곳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그 근거였던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교수법 개혁론도 역시 이러한 그의 교육구상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당시 발달하고 있던 경험과학에 자극을 받아 직관적인 방법을 교수법의 근본원리로 하고 구체적인 것에 대한 경험과 관찰로부터 출발하는 학습법을 강조하여 체계적인 과학보다도 실제적 지식을 앞세우고, 법칙보다도 실례를 앞세우는 것을 모토로 하였다. 그리고 강제와 주입을 배격하였다. 이런 방법에 의해 "학생은 어려움, 권태로움, 아우성과 구타 없이, 마치 놀면서 장난치는 것처럼 하면서도 높은 학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이렇게 해서 학교는 참으로 놀이하는 장소가 되며, 행복과 희열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모든 민중의 자녀가 지적 소질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 거기에 모여서 평화로 향하는 길을 공부하는 학교는 그 자체가 이렇게 즐겁고 평화로우며 강제가 없는 사회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서민대중이 생활의 방법을 공부하는 학교에서의 교육방법은 평이하고 직관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직관적 교수법은 그의 민중 중심의 교육관과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
코메니우스는 비극적인 인물이었다.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은 그의 염원이었던 조국해방이라는 간절한 소원을 무참히 깨버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의 조국은 해방되지 않았다. 범지체계를 전 민중에게 가르침으로써 평화로운 세계국가를 건설한다는 원대한 구상을 가지고는 눈앞에 닥친 조국의 비운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교육적 연금술은 설령 그것이 헛된 꿈이 아니라 하더라도 긴 세월이 걸리는 사업이었다. 그것은 조국이 부딪힌 지금 당장의 위급을 구하는 데는 쓸 수 없는 것이었다. 실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코메니우스는 이윽고 국제정계의 음모가로 등장한다.
그는 지벤뷔르겐 공국의 게오르그 2세 라코치, 스웨덴 왕국의 카알 구스타프 왕등을 설득하여, 신교동맹군을 결성하여 반합스부르크 전쟁을 재개할 것을 권하였다. 또 영국의 친구들?게도 연락하여 이 동맹계획에 대한 지지를 구했다. 지벤뷔르겐 공국의 중신 샤움이 스웨덴 왕에게 가져온 게오르그 2세 명의의 권유장 및 샤움이 영국의 크롬웰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건네준 권유장은 모두 코메니우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동맹계획이 실현되기에 앞서 스웨덴 왕은 병사를 일으켜 폴란드에 침입하였고 1656년에는 지벤뷔르겐 공국도 스웨덴과 동맹하여 전쟁에 가담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코메니우스는 신교국가의 승리를 예언한 드라비크의 예언서 [어둠속의 빛]을 간행하였고 합스부르크 가의 비리를 폭로하여 동맹군을 고무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정말 미친 듯이 반합스부르크 전쟁을 선동하는 데 광분했다. 그러나 이 전쟁도 그에게는 무엇 하나 가져다주지 않은 채로 끝났다. 그후로도 전쟁은 계속 일어났지만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조국이 해방될 것 같은 정치정세는 끝내 오지 않았다.
또다시 실의에 빠진 코메니우스는 이제 정치적 술수와 전쟁의 선동에 의해서 살아 생존에 조국의 해방을 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교육에 의한 평화로운 세계의 실현에 최후의 희망을 걸기로 마음을 고쳐먹고, 만년을 범지체계의 완성에 바쳐 7권의 대저를 계획하고 그 완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죽기 2년 전에 [유일한 필요사(必要事)]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기의 생애를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 속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길고 고통스러운 미로와 같은 생애를 나는 평화를 위한 노력으로 일관해왔다. 나는 백해무익한 다툼을 계속하고 있는 기독교도 국가들을 서로간에 화해시키려는 염원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더구나 지금까지 그러한 노력은 어떠한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열매를 맺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코메니우스의 교육학은 연금술적 교육학이라고 불릴 만큼 유토피아적이며 교육의 힘을 과신하는 데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교육, 즉 공공단체에 의해 조직적으로 관리되는 학교교육은 평화로운 세계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인간적 조건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생각되었으며, 따라서 학교는 국가주의를 위한 또는 군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민이 서로 증오하며 자기 나라만을 사랑하는 정신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같은 언어로 같은 사상, 즉 평화주의 사상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교를 보급시키는 것을 하나의 중요한 '지렛대'로 해서 평화로운 세계국가를 만드는 길 외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학대받는 민족이 행복하게 될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교육을 논한 점에 코메니우스의 귀중함이 있다. 교육은 단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도 또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도 아니며 진실로 세계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상을 우리는 여기서 처음으로 분명한 형태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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